디디의 우산
🔖 그 내용을 알게 되었을 때 나는 그가 부러웠습니다. 두 손으로 조종간을 붙들고 목적지를 향해 전투기를 몰아갔을 그 새끼가 너무 부럽다. 남쪽의 가요를 방송하는 라디오 채널에 주파수를 맞춰두고 음악이 흐르는 전투기에 실려 북측과 남측의 경계를 향해 날아가던 순간, 그 아득한 허공을 날던 순간의 그가 말입니다. 죽음과는 얇은 금속판 한겹만을 남겨둔 채 체공하고 있었지만 그는 분명히 환멸의 반대 방향으로 날아가고 있었어요. 그는 그것을 가지게 된 거죠. 탈출의 경험을.
내게는 그것이 없어.
나는 내 환멸로부터 탈출하여 향해 갈 곳도 없는데요.
🔖 나는 책의 형태의 종이를 수집한다. 아무것도 인쇄되지 않은 노트보다는 무언가 인쇄된 책이 종이로서 더 완전하다고 나는 느낀다. 그림이나 사진보다는 도면이나 문장이 인쇄된 종이가 좋다. 만지기에 더 좋다는 면에서 말이다. 면지의 두께, 감촉, 잉크의 색이나 인쇄 상태가 마음에 들었다는 이유로 무작정 책을 구입하는 일도 많다. 2009년 10월 19일에 인쇄된, 잭 케루악의 <길 위에서 On the Road> 1판 1쇄본과 2009년 2월 16일에 출간된 외젠 다비의 <북호텔 L'Hotel de Nord> 1판 1쇄본 같은 번역본 책들. 하우게의 시집도 그렇게 내 손에 들어왔고 나는 그 책의 종이적 상태에 매우 만족한다. 예전에는 그 정도로 만족스러운 종이를 만나면 똑같은 책을 한권 더 구입하고는 했는데 이제 그런 일은 없다. 같은 날, 같은 인쇄소에서 같은 잉크로 인쇄된 책이라도 상태가 같을 수 없다는 것을 이제 아니까. 미묘하게 다른 것이다 농도나 인쇄 상태 같은 것이. 예컨대 지금 막 식탁 위에 내가 펼쳐둔 슈테판 츠바이크의 <어제의 세계 Die Welt von Gestern>에서 172페이지부터 한동안 이어지는 라이너 마리아 릴케에 관한, 거의 예찬에 가까운 설명 부분은, 다른 책에서는 반복되지 않는다. 내가 가진 <어제의 세계>에서 이 부분은 몹시 아름답게 검고 선명하게 인쇄되어 있지만, 다른 누군가가 가지고 있을 <어제의 세계>에서 같은 부분의 인쇄 상태가 내 것과 같을 확률은 높지 않다. 그 누군가의 어제와 나의 어제가 다른 것만큼은 다를 것이다. 같은 제목, 같은 저자, 같은 출판사로 그 차이가 매우 근소하더라도 그 근소한 차이는 엄연한 차이이고 어떤 사람에게는 그 차이가 매우 중요한 것이다. 여기까지 생각하고 보니 내가 좋아하는 것은 결국, 종이에 인쇄된 검은 잉크인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든다…… 어쨌거나 각각의 책은 냄새도 다르다. 내가 가진 페이지들은 빛바랜 단면 색종이 같은 냄새를 풍기지만 다른 것들은 다를 것이다. 각각의 책은 그것이 속한 공간의 냄새를 풍길 테니까.
🔖 아름다운 것을 생각해야 할 필요가 있을 때마다 나는 별과 책을 생각한다.
내가 읽은 별 이야기 중에 가장 아름다운 것은 앙뚜안 드 생떽쥐뻬리의 고원 착륙기였다. 사하라를 가로질러 프랑스 항공 노선을 개척하던 시기에 그와 그의 우편기는 호버곶과 시스네로스 사이의 편평한 고원에 착륙한 적이 있었다. 수백만년 동안 인간의 손길이 닿지 않은 융기된 해저 단면에서 생떽쥐뻬리는 운석의 잔해를 주웠고, 그것을 이야기로 기록해 남겼다. “사과나무 아래 펼쳐놓은 보자기에는 사과만 떨어지듯, 별 아래 펼쳐놓은 보자기에는 오로지 별의 가루만이 떨어질 뿐이다.” 생떽쥐뻬리는 그 편평한 고원을 하늘 아래 펼쳐진 식탁보, 라고 칭했는데 그러고 보니 그것은 또다른 식탁보, 에 관한 이야기로구나. 울라브 하우게의 식탁보와는 다르면서도 크게 다르지는 않은 식탁보. <어린 왕자 Le Petit Prince>를 썼고 2차 세계대전 중에 정찰기를 타고 나섰다가 실종되었다는 사실 외에 생떽쥐뻬리가 한 인간으로서 어떤 삶을 살았는지 나는 잘 모르지만, 그가 300미터 높이의 고원에 착륙해 운석 조각들을 줍고 “그렇게 하여 나는 별의 우량계가 된 그 고원 위에서, 놀랄 만큼 축약된 형태로, 느리게 쏟아지는 불의 소나기를 목격했던 것”(<인간의 대지>)이라고 기록한 덕분에, 그가 목격했다는 불의 소나기를 나도 목격할 수 있었다. 수백만년의 밤하늘과 별들을. 그리고 그 별의 조각들을 무심하게 얹은 채 수백만년의 시간을 조용히 회전해온 이 별의 높고 춥고 쓸쓸한 단면을.
말하자면 영원을.
🔖 우리는 서로의 사물과 습관과 기척에 익숙하지만 그것을 당연하게 여기지 않는다. 서로를 깨우는 아침, 각자의 일터에서 떨어져 지내는 오후에 주고받는 안부, 피곤한 귀갓길 끝에 만나는 평일의 환영과, 늦잠에서 깨어나 점심이나 저녁을 천천히 만들어 먹는 주말, 그것이 우리의 일상이지만 그와 같은 일상이 문득 중단되는 순간을 우리는 상상한다. 때때로 나는 출근길 전철 안에서, 점심을 먹고 사무실로 돌아가기 위해 신호를 기다리던 횡단보도 앞에서, 서수경이 아직 돌아오지 않은 집에서, 이를 닦다가 세면대 앞에서, 서수경의 퇴근을 기다리며 간단한 저녁식사를 준비하던 부엌에서, 이를테면 내가 피곤하고 평화로울 때, 고요할 때, 아무것도 생각하지 않을 때, 추락을 경험한다. 찰나에 불과해 심호흡 한 번으로 지나가고 말 때도 있지만 그렇지 못할 때도 있고, 후자일 때 나는 그 순간 세상 어딘가에 서수경이 무사하게 있다는 것을 믿기 위해 노력을 해야 한다.
서수경이 죽어도 내게 연락이 오지 않을 것이다.
나는 이 생각에서 자유로워본 적이 없다.
(...) 그렇지 않을 가능성이 있다 하더라도 서수경과 내가 조금 더 염두에 두는 가능성은 서로에게 ‘연락이 오지 않을’ 경우이고 우리는 그 가능성과 살아가며 끊임없이 서로의 죽음을, 혹은 죽음에 이르는 순간을 가정한다. 조금씩 독을 삼키듯 상실을 경험한다. 일상에서 내 기도의 내용은 서수경의 귀가이다. 서수경이 매일 집으로 돌아온다. 그는 저 바깥에서, 매일의 죽음에서 돌아온다.
🔖 인용되었던 “산다는 것은 (...) 우리보다 먼저 존재했던 문장들로부터 삶의 형태들을 받는 것”이라는 롤랑 바르뜨의 말을 참고해본다면, 특별한 문제로도 인식되지 않을 만큼 혐오가 광범위하게 퍼져 있는 사회라면 그 문화가 이어받아온 사유의 메커니즘 자체에 문제가 있다는 뜻이기 때문이다. 1987년 6월혁명의 현장에 있었음을 자랑스럽게 여기지만 지금의 데모를 명분 없는 것으로 치부하는 아버지의 모습에서 화자는 한나 아렌트가 묘사한 아이히만 식의 상투성을, 사유하는 것에 대한 무능함을 본다. “툴을 쥔 인간은 툴의 방식으로 말하고 생각한다”라는 서두의 가정은 이 소설 전체를 끌고 가는 전제다. 사람들이 ‘상식’이라는 말을 사용할 때는 대개 “사리분별을 하고 있지 않은 상태”라는 것, 그저 “굳은 믿음”이자 “몸에 밴 습관”이라는 소설의 통찰은 정확하다. 상식은 강자의 것이다 그러므로 대개 상식은 약함에 대한 혐오와 긴밀한 관계를 맺는다. 혐오는 누군가를 사랑하는 대신 증오하기 때문에 문제인 것이 아니라, 사회에서 반복되어온 이데올로기를 무비판적으로 재생산하기 때문에 문제가 되는 것이다. 무엇보다 ‘상식’이라는 말은 혐오의 작동 방식을 순식간에 비가시적으로 만들어버린다.
(...) 그러나 그 무지가 특수한 사람들의 예외적인 문제가 아니라, 우리 모두가 “묵자(墨字)”의 세계 속에 살아가고 있음을 알려주는 것이 황정은 특유의 날카로운 윤리감각이 드러나는 지점이다. 맹인의 글자를 점자라고 읽는 것은 모두가 알지만, 비맹인의 글자가 묵자라는 것은 대부분 알지 못한다. 볼 수 있다는 세상의 기본적인 전제에서 바라볼 때, “그것을 말할 필요가 없”기에 무지는 수치스러운 것으로 들춰지지 않고 용인되어왔다.